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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4 병원 카드 분실 사건, 난임병원 졸업

kye2330 2025. 10. 1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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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평소와 같이 단축근무로 3시반에 5호선으로 퇴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차병원 콜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누가 광화문역에서 내 병원카드를 습득했다는 것이다. ㅋㅋㅋ 사실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 내가 잃어버린 줄도 몰랐는데, 내가 항상 넣어두는 주머니를 보니 카드가 없어졌다. 시술을 하려면 흰색 RI카드가 필수이고, 이걸 좀 눈에 띄는 곳에 두고 싶어서 배낭 맨 앞 주머니에 넣어두고 임신 후에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지만 귀찮아서 따로 빼지 않았다. 임산부 뱃지도 같은 주머니에 넣어두고 지하철을 탈 때마다 뺐다 넣었다 했는데, 열차를 타기 직전 뱃지를 빼면서 카드가 같이 빠졌나보다. 카드를 자세히 본 적이 없는데, 별 다른 정보가 없을텐데 그 사람이 어떻게 차병원까지 전화해줄 생각을 했나 고맙고 신기했다. 습득한 사람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길래 바로 전화를 걸었는데 약간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분이었고, 지금 그 카드를 가진 상태로 종로3가역에서 내려서 3호선으로 갈아타 남부터미널역에서 내린다고 한다. 어차피 우리집 근처이니 잘됐다 싶어서 남터역 역무실에 맡겨 달라고 했다. 당시 나는 분당선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맘 편하게 내일이나 내일 모레 남터역으로 퇴근하면서 가져가야겠다 싶었는데, 문득 어차피 내가 한티역에서 버스를 타고 남터역으로 지금 가면 왠지 바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집에서 내리지 않고 남터역까지 갔다.

 

남터역은 올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구조가 조금 특이하고 한산하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없다.) 역무실 찾는 것도 어려워서 전화해서 겨우 찾아갔는데, 분명히 그분이 남터역에 내리고도 남은 시간일텐데 카드를 맡기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분명 전화상으로는 착하신 분 같아서 (특히 차병원 콜센터까지 전화해줄 정성을 생각하면) 그냥 사정이 있어서 좀 늦게 오시는 거겠지 하고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는데, 어쨌든 카드가 없다고 하니 문자로 역무실 위치 설명을 드렸고, 혹시라도 못찾아서 나가셨다면 근처 파출소에 맡겨 달라고 했다. 결국 헛수고를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하필 비도 많이 오고 환승 되는 버스를 타고 가느라 결국 집에는 1시간 늦게 도착했다. 칠칠맞지 못한 나를 탓하기도 하고, 지금 시술 중인게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갑자기 RI카드가 원래 어떻게 생겼었나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봤다.

 

앞면은 나와 남편의 이름, 생년월일만 적혀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인터넷에서 찾은 뒷면을 보니 "이 카드는 체외수정 시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카드입니다.", "분실 시 재발급 비용이 발생합니다.", "이 카드를 습득하신 분은 차병원 콜센터로 연락해 주세요." 같은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마도 이 뒷면을 보고 바로 전화를 하신게 아닌가 싶다. ㅋㅋㅋ 아무래도 일반 신용카드도 아니고 병원 카드이다보니 조금 안쓰럽게 생각을 하셨나.. 어차피 이 카드로 도용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마음도 좋으신 분 같아서 그냥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집에 돌아온지 한 15분이 되어서 드디어 답장이 왔다. 알고 보니 남터역 역무실에 들렸는데 직원이 없어서 못 맡기고 근처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하셨고, 다시 돌아갈 때 역무실을 들려 보겠다고 하신다. 휴우.. 넘 다행이다! 역시 내 전화상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시름 놓고 나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ㅋㅋㅋ (이것도 좀 특이한 현상이다. 보통 저녁 시간이 되어도 입덧 때문에 배가 안고픈데 이걸로 은근히 에너지를 썼나?) 비도 오고 어제 저녁부터 먹고 싶었던 칼국수가 미친듯이 땡겨서 이모네칼국수로 직행했다. 역시 가끔씩 와서 충전해줘야 하는 이맛! 칼칼함으로 온몸을 도배하는 와중 다시 답장이 왔다. 돌아가는 길에 남터역을 갔는데 이번에도 문이 닫혀 있어서 못 맡기고, 최종 도착지인 마포역을 시도해보겠다고 한다. ㅋㅋㅋㅋ 뭐 그래도 마포역이면 회사 근처니까... 그것만 해도 감사한거지. (사실 이 상황까지 오니까, 그냥 재발급 해도 비용 얼마 안드는데 왜 이렇게 간절히 찾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또 마포역 역무실에 사람이 없을까봐 혹시 몰라 집에 와서 역무실로 전화를 해봤다. 상황을 설명했는데, 안그래도 방금! 어떤 분이 그 카드를 맡기고 갔다고 한다. ㅋㅋㅋ 수요일에 찾으러 간다고 하고, 그 분께는 문자로 너무 감사하다, 편안한 저녁 보내시라고 인사를 남겼다. 근데 진심으로 너무 따뜻한 답장을 받았다. "그래요. 우리 아들 며느리랑 비슷한 나이라 더욱~~ 좋은 결과 있으시길."

 

후식으로 망고를 먹고 있던 나는 갑자기 이 답장을 읽고 저항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 이후로 설거지 하면서 계속 울었음..) 임신 소식을 알고 나서도 이렇게 많이 울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그랬던 걸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점에서 감동을 받았고, 그냥 그렇게 끝낼 수 있었는데 그 와중에 카드 한 장에 담긴 나의 사연(?)을 공감하는, 결혼한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는 것도 감동이었다. 아마도 이런 사연을 생각해서 귀찮더라도 역무실을 몇 번이고 찾아가며 맡겨주신 거겠지. 물론 지금은 임신에 성공해서 해피엔딩이 되었지만, 그간 병원을 다니며 느꼈던 고통이 한 번에 위로 받는 느낌이 들면서 주체할 수 없이 계속 울었다. (이러다가 포도막염이 재발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나도 이렇게 사소하지만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남자들(아빠들)은 직접 겪지 않으니 공감을 못할 거라는 건방진 생각을 했던 나를 반성하고, 세상은 아직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걸 쓰는 오늘까지 다행히 안압이 안 올라간 걸 보니 다행히 눈 염증도 재발 안한 것 같다. 오늘 하루 휴가이니 눈도 잘 쉬며 관리해야지..

 

 

타이밍 좋게 그 다음날인 오늘 아침 난임센터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10주 4일) 3주간 잘 살고 있나, 잘 크고 있나 궁금했는데,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오히려 지금 주수보다 며칠 더 앞서서 잘 크고 있었다! 아침 체조 중이었는지 팔다리를 워낙 휘젓고 360도 공중제비를 돌고 있어서 심장박동을 재는데 약간 애를 먹었지만 ㅋㅋㅋ 4.2cm 밖에 안되는 아기가 신나게 움직이고 있는 걸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졸업 선물(?)로 이식한 배아 사진이 담긴 축하 편지도 받았다. 이식 당일 수술실에서 나만 배아를 보고 사진을 못찍어서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선물을 받다니! 너무 센스 있다. 골프공에서 젤리곰으로, 그리고 팔다리를 휘젓고 돌아다니는 어엿한 4.2cm 아기로 성장하기까지 짧은 시간이지만 이게 엄마가 느끼는 특권 같은 행복이 아닌가 싶다. 어제 겪은 해프닝처럼, 나도 엄마가 되면 조금 더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