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K's Library

'호안가'에 대한 단상 - 신조어의 창의성과 직관성 딜레마 본문

What I Study - Language

'호안가'에 대한 단상 - 신조어의 창의성과 직관성 딜레마

kye2330 2021. 6. 1. 23:25
728x90

저번주 일요일 반포대교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다가 내 시선을 끈 현수막이 있었다.

 

"음주 후 호안가 접근 자제 당신의 안전을 지키세요."

 

호안가라..? 일단 생전 처음 들어본 단어이고 바로는 유추가 안되는데, 한 3초 생각해보니 '바다 근처=해안가'를 응용하여 '호수 근처=호안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호안가를 검색해보니 몇 개의 글이 나온다.

 

http://www.yongin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872 

 

고양시, 논란의 호수공원 호안가 인공암 전격 철거 - 용인일보

[경인신문]고양시는 호수공원 인공폭포의 인공암에서 발생되는 유리섬유 논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지난 1일부터 호안가의 인공암 구조물을 긴급 철거한다고 밝혔다.1995년에 만들어진

www.yonginilbo.co.kr

https://opengov.seoul.go.kr/sanction/1525142

 

이촌한강공원 호안가 점검 조사 보고

이촌한강공원 호안가 점검 조사 보고

opengov.seoul.go.kr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0311310946 

 

선유도 호안가 일부 개방

서울 시민의 날을 맞아 그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던 선유도 일부가 개방됩니다. 26일부터 이틀동안 개방되는 선유도 호안은 약1.7km 길이로…

news.sbs.co.kr

 

고양시 호수공원 근처를 표현하기 위해 '호안가'를 쓴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한강공원 근처를 '호안가'라고 표현하다니..? 약간 아리송하다. 

 

만약 '호수 근처'라는 정의가 존재한다면 한강공원에는 쓰면 안되는 표현이다. 이런 걸 언어학에서는 규범적(prescriptive)이라고 한다. 이미 정해진(=미리 적혀진=prescriptive) 원칙이 있고 이에 입각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혹시 몰라 '호수'의 정의를 찾아보았는데, "땅이 우묵하게 들어가 물이 괴어 있는 곳"이다. 물이 계속해서 흐르는 강은 호수에 포함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기술적(descriptive)으로 접근한다면 한강공원에 대해 호안가라는 표현을 써도 문제는 없다. 호수공원이든 한강공원이든 모두 '호안가'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니, (호수든 강이든) '물 근처'라는 의미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언어도 일종의 사회적 규칙으로서 규범이 필요하긴 하지만, 살아 숨쉬는 생명체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 기술적 접근도 필요할 때가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자장면'이 맞지만 모두가 '짜장면'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짜장면'이 규범(사전, 표준어)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나는 기술적 접근도 매우 중요하고 흥미롭게 느끼지만, 개인적으로 '호안가'에 대해서는 규범적으로 접근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일단 이 표현 자체가 기술적으로 분석하기에는 너무 사용빈도가 적다. 구글에서 호안가를 검색하면 글이 1,160개밖에 나오지 않는다. (겹치는 페이지까지 생각하면 더 적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딱히 즐겨 쓸만한 소재의 단어가 아니다보니 회자될 일도 없다. 검색 결과도 보니 정부 사이트의 글, 지방 뉴스 사이트의 기사들이 대부분이라서 보는 사람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규범/기술을 다 떠나서 나의 진정한 의견은 이 표현 자체를 생략하거나 '연안', '근처', '주변' 등 더 직관적인 단어로 대체하는 것이다. '호안가'라는 표현이 새로운 사회현상이나 아이디어를 담고 있으면 모르겠지만, 정말 단순히 '호수/강 근처'라는 의미밖에 없는데 굳이 2-3초 더 생각해야 하는 새 표현을 써야할까? 더 직관적이고 널리 쓰이는 단어가 있는데 말이다.

 

'해안가'에서 영감을 받아 '호안가'를 만든 것은 창의력 점수를 조금 줄 수는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직관성은 떨어진다. '선유도 호안가 일부 개방'은 그냥 '선유도 일부 개방'으로, '이촌한강공원 호안가 점검'도 '이촌한강공원 점검'으로, '호수공원 호안가 인공암 전격 철거'도 '호수공원 인공암 전격 철거'로 과감히 호안가를 빼는 게 깔끔하다. 굳이 넣고 싶다면 '연안'을 넣으면 의미가 더 잘 통할 듯하다.

 

신조어가 탄생한 배경은 각자가 다르겠지만, 이렇게 항상 창의성과 직관성 모두를 충족하기는 어렵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한다면 그 단어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오래 생존하겠지만, 둘 중 하나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수명은 길지 않을 것이다.